11월 24, 2024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박칼린, 5년 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 삶 마감하더라도 후회 안 한다고 한 이유가..

196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박칼린, 1989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하면서 자신을 처음 알리고 이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사운드 오브 뮤직> <렌트> <시카고> <미녀와 야수> <아이다> <한여름 밤의 꿈> 등의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특히 <한여름 밤의 꿈>은 연출 및 음악 감독을 동시에 맡았던 작품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으며 2010년 예능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그 이전까지는 음악 감독으로 유명했었다면 방송 이후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됐는데 그녀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 직후 어떻게 하다가 부모님께서 유복한 환경에서 사셨지만 저희한테 따로 재산이 온 건 없어요. 어머니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는데 처음에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한국의 전통 민요 ‘아리랑’을 불렀죠. 그것이 두 분의 사랑의 시작이었어요.”

리투아니아는 사실

우리나라와 굉장히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이 침략당한 역사를 갖고 있기에 우리의 한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데요.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으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는 방식은 독특했는데 당시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무작정 결혼하고 아이부터 낳고 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결혼부터 해서 우리 세자매를 낳으셨어요. 나중에 한국에 귀국할 때도 아버지는 일이 있어서 미국에 남아 2, 3달 뒤에 들어오셨고 어머니와 우리 삼자매만 먼저 한국으로 귀국했죠.” “어머니랑 우리 자매들이 함께 먼저 시댁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는데 이를 본 할머니는 두 달을 드러눕고 말았어요.”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얼마나 막막했을지 짐작이 가는데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고난, 이민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을테니 한국의 고된 시집살이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것이죠.

이후 박칼린은

부산 사투리를 배우며 보통의 한국 어린이처럼 성장하지만 혼혈이였던 그녀의 외모는 이국적이였기에 곧이어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 시작합니다.8살 무렵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던 와중 한 중학생이 다가와 ‘너네 나라로 가버려’라고 했고 이에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는 “칼린, 여기도 내 나라고 미국도 내 나라야. 그리고 모든 나라가 너의 나라란다.”라고 하시고는 같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데요.

계속해서 어린 그녀에게 부모님은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경험을 제외하고는 무척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고 부유한 아버지와 재능 많은 어머니가 그녀를 한껏 북돋아주었습니다.또한 8살때부터 화교 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는데 10살 이전에 언어를 배우면 배우는 속도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였습니다.

이후 11살 때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언니의 권유로 첼로를 배우게 되는데 이때부터 음악에 눈을 뜨는 시작합니다. 한국에 사는 동안 영어를 잊었던 그녀가 다시금 미국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연히 첼로에 몰두하게 된것인데요.

서서히 실력이 쌓이자

학교 오케스트라에 발탁되었고 연주에 참여 하는 날이 이어지게 되었는데 어느날 연극부와 합동 공연을 하면서 또 다른 기회가 찾아 옵니다.연극반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조용히 앉아 첼로를 연주하는 그녀를 눈여겨봤고 연극에 투입시킨 것이었는데 매사의 진심인 그녀는 연극반 활동을 하며 고교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본인의 재능을 뽐냅니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한국으로 넘어와 서울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이렇게 음악가의 길만 걷나 싶었으나 돌연 부산으로 내려가 연극배우가 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그녀는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는데요.

고등학교 시절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어릴 적의 추억이 그녀를 연극판으로 이끌었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이렇게 연극배우로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가 어떻게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 큰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한국 뮤지컬계는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젊은 나이에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분야였습니다. 연극에 음악을 접하는 것은 뮤지컬처럼 큰 역할이 아니었고, 또한 우리나라의 가난한 연극판의 경우에 전문적인 음악인을 쓸 수도 없는 형편이었는데요.

그런와중에 미국 대학과 서울대 석사 출신의 음악 학도라는 타이틀은 자연스럽게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것입니다. 주요 요직을 맡았고 그 역할 또한 훌륭히 해냈기에 명성이 올라간것입니다.결국 20대 초반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또한 시대적인 흐름을 잘 타고 나면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녀의 영향으로 독특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바로 초창기 유명한 뮤지컬 감독들은 전부 여자였다는 사실인데 해외에서도 한국의 상황은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1990년대 뮤지컬계에서 명성과 실력을 쌓은 그녀는 2010년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자격>에 출연하여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당시 대중들은 박칼린의 뮤지컬 지휘 실력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독특한 리더십에 더 열광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피로 때문에 병원을 찾은 그녀는 양쪽 신장이 모두 손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병원에선 신장 이식을 권고받았지만 평생 투석해야 한다는 말에 치료를 포기합니다. 양쪽 신장에 다 문제가 있어서 4, 5년 정도 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지만 덤덤하게 받아드린 그녀는 다음과 같이 심경을 전했습니다.

“만약 5분 뒤에 생을 마감한다 해도 후회가 없어요. 진짜 저는 후회 없이 살았어요. 남들이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이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다 뿌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가도 여한이 없어요.” 지금 당장 끝나도 여한이 없는 삶이라고 말하는 그녀, 확실히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박칼린다운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이 인터뷰는 2010년에 진행된것입니다.

불과 4,5년인 시한부 얘기를 들었지만 현재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특유의 최선을 다하는 에너지 넘치는 삶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녀가 아프지 않고 지금처럼 행복한 나날만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