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과 같이 사람은 웃는 얼굴에 호감을 가지게 되어 있고, 오죽하면 웃음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가수 김종민 역시 2000년도 코요테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180여 개의 예능 프로에서 늘 한결같은 미소와 사람 좋은 웃음으로 활약하며 때로는 ‘바보’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웃는 그의 얼굴은 대중들에게 큰 호감을 주며 현재 유재석과 더불어 연예계에 몇 없는 안티 없는 연예인 중 한 명입니다.
그렇다 보니 2016년에는 kbs 연예대상까지 차지하며 유재석에 이은 브랜드 파워에서 2위까지 차지할 정도로 그야말로 예능인으로서 정상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인생사 호사다마라고 마냥 순수하고 화려한 모습 뒤에 감춰진 진짜 인간 김종민의 삶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수 많은 비극들이 쏟아져야만 했습니다.
그는 한때 내진탕과 이틀간 혼수 상태에 빠져 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지 부모님을 원망해야 했고 또한 최악의 슬럼프 때 시청자들이 그에게 암적인 존재라며 하차 서명 운동까지 벌이자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나?, 인생은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라며 은퇴를 고민하며 방청객과 후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무것도 못한 채 최악의 자괴감을 느껴야 했던 김종민 그의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뇌진탕 사고로 충격을 먹었던 김종민의 어린시절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종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쑥기와 말주변이 없어 이때 이미 별명이 ‘어리버리’였고,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무대에서 춤을 추는 거 보고 홀딱 반해 ‘나도 저렇게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해 그날부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 때면 항상 장난을 치며 뛰어내리는 걸 좋아했던 그는 한 번은 평소처럼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늘 뛰어내리던 곳에서 그날도 뛰어내렸는데 그런데 이때 뒤를 돌아보다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이 사고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사고 직후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무려 이틀간이나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가족들조차 포기할 정도였다가 기적처럼 구사일생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고의 충격이 컸는지 사고 전만 하더라도 장난은 좀 치더라도 나름 우등생이었던 그가 사고 이후부터는 만약 하늘로 가면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그 어린 나이에 삶의 의욕이 사라져 공부를 완전히 놓아버리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매일을 그냥 멍하게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었던 김종민
이처럼 사고 이후에는 줄곧 무기력하게 보냈으나 그럼에도 유일한 탈출구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춤으로, 당시 그는 춤출 때만큼은 세상 걱정 근심 다 잊고 마냥 행복해서 오직 춤에만 빠져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그가 춤을 추느라 학교를 안 가고 결석을 밥 먹듯이 하다 보니 당시 그의 아버지는 늘 걱정이었고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가 전화가 와 “아들 학교는 그래도 가야지”라고 하셨는데 이 통화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춤에 빠져 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20년을 넘게 하던 택시 운전을 정리하고 이제 횟집을 하겠다며 바닷가 앞 횟집 개업을 준비하다가 물이 들어오는 것을 미처 생각을 못하고 밀물 때 주차를 하다가 그만 사고가 나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차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작은 고모부도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래도 작은 고모부는 운 좋게 나와서 이후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구하려고 했으나 수압이 너무 세서 끝내 아버지를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택시 기사를 하던 아버지가 충남 서산에 내려갔다가 밀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항상 장난을 좋아하고 농담을 즐기며 유쾌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자 당시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때 내가 살아온 인생에 울었던 것 중에 가장 많이 울었고 또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거짓말 같고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심지어 어머니께서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오셨는데도 나는 믿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아버지의 소식을 계속 안 믿었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김종민은 어린 시절
김종민은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보낸 뒤로는 너무나도 힘들어 하루라도 있고 싶은 마음에 이때부터 그저 춤에만 몰두하게 되는데, 당시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한 동작을 익히기 위해 대여섯 시간씩 연습을 해 당시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다 못해 나중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춤 연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다 보니 지하철을 타면 서 있을 힘조차 없어서 주저앉곤 했고 그래도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이후 그의 춤 실력이 소문이 나면서 당시 최고의 댄스 전문 안무팀 ‘프렌즈’에 정식 입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처음 받은 월급이 고작 4만 원뿐이라 생계를 위해서는 춤만 출 게 아니라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당시 공사장도 많이 가고 달력 공장, 시계 공장, 웨이터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훗날 그가 이때를 고백하길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매일 놀러만 다니다가 아버지가 딱 돌아가시자 내 다리가 땅에 박혀서 못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위를 봤는데 엄마는 일 안 하고 있지, 누나도 이제 대학생이지, 동생도 어리지 생계고 보고 아무 대책이 없었다.
그때 내가 든 생각이 이 집에서 돈 벌 사람은 나뿐이구나, 내가 가장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공부는 이미 오래전에 벌려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힘들고 내가 가장 할 줄 아는 게 뭔가 생각을 해봤더니 춤밖에 없더라. 그래서 이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엄마에게는 참 죄송하고 철이 없었던 게 그때 돈을 벌면 오롯이 나한테 다 썼다. 당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마음이 너무 다쳤기 때문에 내 마음의 상처 치유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그래서 이때 놀러도 많이 다니고 버는 대로 내가 다 썼다 물론 철이 없었던 것도 맞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솔직히 원망도 많이 했다. 내가 왜 이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할까 나도 아직 학생인데 왜 우리 부모는 부자가 아닌가라면서 피해 의식이 심했었다.
그렇게 엇나가던 시절 엄마가 나에게 돈 좀 달라고 했었는데 거기에 또 원망스럽더라 그래서 내가 없다고 하고 오히려 엄마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아무튼 지금 돌이켜봐도 정말 부끄럽고 질풍 노도의 시기였지만, 그러나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무거워서 그랬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댄서로 시작해 드디어 가수가 된 김종민
아무튼 이후 월급 4만 원을 받아가며 춤과 일을 병행하다가 1998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엄정화의 전담 댄서로 비중 있게 활약하면서 노래뿐만 아니라 백댄서인 그의 인기가 치솟더니 마침내 4만 원 받던 월급이 120만 원까지 오르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 처음으로 어머니께 생활비를 하라며 월급의 반 60만 원을 드릴 수 있었고 또한 그가 가수가 아닌 백댄서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춤 실력으로 웬만한 연예인보다 인기가 더 많아서 수많은 팬들이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릴 정도로 호화로운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비슷한 시기에 댄서로 활동을 했던 가수 휘성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김종민이 댄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연예인급 이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걸 보고 어린 마음에 꼭 김종민처럼 멋있는 댄서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요즘 김종민의 모습을 보면 그때와는 너무 다른 이미지라 영혼이 바뀐 건 아닌지 생각이 될 정도로 신기하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엄정화의 백댄서로 큰 인기를 얻었고 그리고 이를 계기로 엄정화의 음반을 만들었던 프로듀서의 소개로 마침내 지금의 ‘코요테’라는 팀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때 신지의 나이가 만 19 김종민의 나이가 21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댄서가 하루아침에 가수가 되는 게 쉽지 않았는지 당시 그는 엄청 헤맸었고 그럼에도 코요테 멤버들이 다들 착해서 텃새도 전혀 안 부리고 많이 도와줬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너무 자주 가사를 까먹고 틀리자 당시 신지가 답답했는지 그에게 “야! 네가 가수야?”라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어찌 됐든 김종민 그가 코요태에 합류하자 잘생긴 외모와 댄스 시절부터 많았던 팬덤 덕분인지 코요태가 처음으로 1위까지 차지하며 말 그대로 그는 복동이었고, 그래서 이때 코요태가 음악방송 1위와 더불어 연말 시상식에서도 5년 연속 올해의 가수상에 등극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미지를 깨고 진정한 예능인으로 등극하게 된 김종민
그렇게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지금 예능에서 보던 이미지와 달리 굉장히 잘생긴 신비로운 왕자님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래서 당시 소속사 사장도 그가 말을 하는 순간 깬다는 걸 알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더라도 되도록이면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이홍렬 쇼에 나갔다가 무심코 본 성격대로 이야기를 했다가 방청석과 시청자들이 완전히 뒤집어지면서 결국 지금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말았고 그래서 이때 댄서 시절부터 그를을 좋아했던 팬들이 김종민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실망했어요”, “오빠 말을 왜 그렇게 해요?”라고 하며 그동안 카리스마 있는 멋진 오빠라는 환상이 다 깨져 그의 곁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모습을 숨기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이때부터 가수 김종민보다는 수 많은 예능에서 활약하며 예능인 김종민으로서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 2007년에는 국민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의 원년 멤버로 엄청난 활약을 하며 거의 예능의 신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오죽하면 이때 강호동이 그에게 “종민아 너 혼자 다 해먹냐? 너만 분량이 너무 많으니 좀 살살 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이때 그는 어떠한 예능에 나가더라도 제 값을 하는 인물로 그야말로 예능의 신다운 모습을 보였고 그러다 2008년 군 복무를 위해 모든 활동을 접고 사회복무요원 즉 공익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역 후 찾아 온 슬럼프와 하차 서명운동
김종민이 군 복무를 모두 마치고 다시 방송에 복귀하려 하자 당시 방송계에서는 예능의 신이 돌아왔다며 김종민의 복귀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역 후 당시 그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부담이 됐던지 예전의 예능에서 활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병풍이 되어 변화된 예능 프로에 적응을 제대로 못하는 최악의 슬럼프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특히 그에게 있어 가장 핵심 프로였던 1박 2일에서의 부진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오죽하면 당시 “밥차 아주머니가 김종민보다 더 활약 한다”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였고 심지어 이때 1박 2일의 극성 팬들이 오히려 “김종민이 들어오고 1박 2일이 더 재미없어졌다”며 그의 하차 서명 운동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훗날 그가 이때를 고백하길 “운동이라면 3.1 운동은 들어봤는데 나를 걸고 서명 운동이 벌어지다니 이런 건 난생 처음이었다.
당시 시청자 게시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읽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 ‘김종민이 1박 2일에 복귀하고 10개월 동안 한 게 없다’, ‘시청률도 좋은데 왜 김종민을 안고 가야 하나’, ‘김종민보다 밥차 아주머니가 더 웃기다’ 등 비난 글들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가장 심하게 후벼 팠던 글은 암종민이다. 하차하라며 나보고 암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
그렇게 당시 나는 나에 대한 모든 댓글들을 맨 정신으로 힘들면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말 독하게 하나씩 다 봤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날 더러 하차라고 막 서명 운동까지 하는 걸 보니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나 인생은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라. 그래서 이때 1박 2일을 촬영하면서 하차 생각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그리고 당시 1박 1 하면서 오프닝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농담도 하고 웃으면서 하는데 하지만 나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솔직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편하게 놀고 놀이터 같았던 게 1박 2일이었는데 2년 동안 떠났다가 막상 돌아와 보니 내 게 아니었다. 너무 낯설고 더 이상 내 기억 속에 1박 2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마음이 공허하고 다음 촬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번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호동이 형이 내가 예능에 복귀했다며 멍석을 깔아준 적이 있는데 그때 ‘호동이 형이 여러분 예능 의신 김종민이 돌아왔습니다. 종민아 뭐 해줄 거야? 웃길 거야? 종민아 나가’라고 하며 한껏 소개했는데 그런데 내가 이때 아무것도 못하고 방청객과 후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너무 싸할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나 때문에 도저히 분위기 수습이 안 되자 그때 호동이 형이 ‘야 쉬었다 가자’ 라고 딱 그 한마디 하시는데 내가 예능인으로서 최악의 자괴감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결국 이날 이후 나는 1박 2일을 제외한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을 정리하고 1박 2일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으니 여기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1박 2일에만 올인을 했는데도 만약 내가 그래도 웃기지 못한다면 이때는 은퇴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당시 내가 마음에 품었던 생각은 단 하나로 한 번만 웃기자 1박 2일 동안 한 번만 웃겨보자 내일은 낫겠지와 같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매번 촬영에 임했다”라고 했습니다.
암흑기를 잘 극복하고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 된 김종민
아무튼 그렇게 그는 본인의 방송 인생 중에서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다가 2011년 강호동이 탈세 파문으로 은퇴를 하자 이상하게도 이때부터 1박 2일에서의 그의 방송 분량이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 단순한 어리버리함을 넘어서 뭐가 언제 어떻게 웃길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예전의 예능의 신 같은 맹활약을 보여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김종민 그가 고백하길 “요새 들어서야 지금 하는 이 방송 일을 끝까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 열정을 갖고 시간과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장사가 끝까지 갈 수 있으며 어떤 일이라고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만 결국은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 길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더라 이걸 왜 예전에는 몰랐나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또 슬럼프가 올 수 있다. 하지만 행여나 슬럼프가 다시 온다고 해도 이제는 극복하는 법을 알아서 괜찮다 극복하는 방법이 뭐냐면 그냥 단순해지는 거다.
뭐가 안 풀릴 때 일단 고민하지 말고 무조건 열심히 몸을 쓰면서 부딪혀보는 거다.
그렇게 하루 종일 고대에 부딪혀보고 집에 돌아갈 때 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뭐 어쩌겠어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었는 걸 ‘이라고 말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고민했던 문제들이 다 풀리고 실력도 그만큼 늘어난다. 팔굽혀 펴기를 해보면 그렇다. 만약 내가 10개까지 할 수 있다면 거기에 하나를 더해서 11개를 하는 게 정말 힘든 거다 그런데 온 힘을 다하면 11개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12개 13개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걱정 안 한다 11개를 일단 만들다 보면 뭐든 다 잘 될 테니까” 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