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지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여배우들이 참 많습니다. 수능 점수 400점 만점에 385점을 기록한 서울대학교 출신 김태희 씨, 고교 시절 내내 의대 진학을 목표로 했다는 경희대학교 출신 한가인 씨, 그리고 최근에는 영화 <박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쟁쟁한 작품에서 활약 중인 연세대 출신 최희서 씨가 주목을 받고 있죠.
그런데 이런 명문대 출신 여배우의 원조 격인 이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원조 트로이카 윤정희 씨입니다.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연 윤정희 씨. 그 이후로도 꾸준히 영화배우로서 활약했던 그녀는 지난 2019년 11월 남편인 백건우 씨의 인터뷰를 통해 알츠하이머 투병 소식을 전한 바 있죠.
그런데 그런 그녀가 향년 79세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이들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설의 시작
1944년생 윤정희 씨가 젊을 당시는 여성으로 태어나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극 영화과 석사를 손에 넣었고, 보다 깊은 예술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다는 열망 아래 무려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했죠.
윤정희 씨는 대학 졸업 후 1967년에 처음 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영화 <청춘극장>에서 오유경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1960~70년대 대한민국 여배우 트로이카에 이름을 올렸죠. 배움이 길었던 만큼 그녀가 가진 연기의 폭 역시 매우 넓었습니다. 당시의 여배우는 통상적으로 ‘청순가련형’ 혹은 ‘요부형’의 캐릭터 밖에는 맡지 못했죠. 그 때문에 대다수의 여배우들은 정해진 한계 내에서 주어진 배역만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윤정희 씨는 이 두 유형의 캐릭터 외에도 백치미를 가진 인물까지 능숙하게 연기해내며 자신만의 진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지난 2010년에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통해 결코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과 연기력을 증명한 바 있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윤정희 씨는 1967년 데뷔 이후 은퇴를 선언한 2010년까지 무려 대종상 여우주연상 3회 청룡 영화상 여우주연상 3회, 그리고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3회나 수상하며 그야말로 여배우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왕좌에 앉기도 했죠.
남편 백건우와의 인연
그 시절 윤정희 씨를 사랑했던 이는 대중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별명을 가진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 역시도 윤정희 씨를 열렬히 사모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죠.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문화올림픽, 이 자리가 바로 윤정희 씨와 백건우 씨가 처음 만난 자리였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재독 작곡가 윤희상 씨의 오페라 <심청이> 공연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윤정희 씨 역시 영화인 자격으로 해당 자리에 참석했죠. 그녀는 낯선 환경 때문인지 오페라 공연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맸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백건우 씨였죠.
백건우 씨는 아마도 아름다운 윤정희 씨와 마주친 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 같습니다. 오페라 <심청이> 공연 직후 열린 뒤풀이에서 갑작스럽게 꽃을 사와 윤정희 씨에게 건넨 것을 보면 말이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호감을 느끼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윤정현 씨가 한국으로 귀국하며 연락이 끊기게 됩니다.
그런 두 사람이 재회하게 된 것은 2년 뒤 프랑스였습니다. 마침 윤정희 씨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길이었고 현지 한인 식당에서 다시금 백건우 씨를 마주하게 되었죠. 그간 연락을 나누었던 것도 아니고 첫 만남 장소를 다시 찾아간 것도 아니건만 기적처럼 서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둘만의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결국 이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신들만의 신혼집을 마련하여 이른 동거를 시작했고 비밀 연애를 이어가던 중 1976년에 화촉을 밝혔죠.
갑작스러운 위기
언제까지나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 하지만 이런 그들에게 뜻밖의 위기가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때는 1977년 7월 말 당시 윤정희 씨와 백건희 씨 그리고 두 사람의 갓난쟁이 딸은 구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에 방문한 바 있죠. 그런 그들이 갑작스럽게 북한 공x원에 의해 납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故 이응노 화백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백건우 씨. 거의 친아버지처럼 그를 모실 정도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이응노 화백의 아내인 박인경 씨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옵니다.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갑부가 당신을 초청해 연주를 듣고 싶어 한다”라는 것이 그 제안이었죠.
백건우 씨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부모처럼 따르던 이응노 화백과 박인경 씨의 요청이었던 터라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죠.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을 북한으로 납치해 가려는 공작원들의 수작이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정희 씨 부부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났고 이 소식은 곧장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큰 파장을 빚었죠.
투병, 내 머리속의 지우개
그러나 이렇듯 파란만장했던 윤정희 씨의 일대기 안타깝게도 그녀의 삶에 펼쳐진 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19년 11월 백건우 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내 윤정희 씨가 10여 년째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당시 그녀의 상태는 이미 심각해질 때로 심각해져서 심지어는 친딸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죠. 실제로 윤정희 씨는 친딸인 백진희 씨조차 알아보지 못하며 “왜 나를 엄마라고 부르느냐”라고 되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윤정희 씨의 투병 소식이 전해진 지 1년 반 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의문의 청원 글이 하나 올라옵니다. 제목은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쓰러져가는 영화 배우 윤정희를 구해주세요’. 해당 글을 작성한 청원자는 윤정희 씨가 서울에서 치료를 받던 중 남편과 친딸에 의해 파리에 끌려갔다며,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죠. 또한 그는 “윤정희는 본인의 집에서 쫓겨나 파리 외곽의 아파트에서 홀로 알츠하이머 및 당뇨병 투병 중이다” 라며 “백건우는 아내를 만나지 않은 지가 2년이 훨씬 넘었고, 아내의 병간호도 못하겠다면서 형제들에게 떠넘긴 지가 오래다”라는 주장까지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청원 글은 곧바로 2월 7일 백건우 씨의 소속사에 의해 완벽하게 반박됩니다. 백건우 씨 소속사인 빈체로는 “해당 청원의 내용은 거짓이며 윤정희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죠. 해당 글에 따르면 그녀의 가족들은 윤정희 씨가 모친상을 당한 2019년 초 한국에 귀국한 그녀를 위해 고향에 머물 수 있는 요양원을 알아보았다고 하죠.
그러나 그녀가 원체 한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던 터라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환경을 찾는 데 실패했고, 결국 다시 파리로 돌아가 딸인 백진희 씨 집 근처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문 인력인 간호사들과 가족들이 함께 윤정희 씨를 돌보고 있으며 당초 청원글에서 언급했던 대로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거나 금전적인 횡령은 전혀 없었다고 일축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못한 윤정희 씨의 동생들. 이로 인해 투병 중인 윤정희 씨의 후견인을 선정하는 재판이 프랑스에서 열렸고 이 갈등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윤정희 씨의 재산을 두고 펼쳐졌던 ‘성년후견인 소송’은 그녀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법적 판단 없이 종료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별이 되다
아름다운 외모와 지혜로운 두뇌를 타고난 윤정희 씨 하지만 그녀의 일생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렇게 쌓아온 부로 인해 가족들이 소송에 휘말리기 했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했던 이들에 의해 납치 위협을 겪기도 했죠.
이처럼 다양한 풍파를 겪었던 그녀지만 세상을 떠난 지금 하늘 위에서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병마와 각종 사건을 모두 잊고 그저 행복했던 순간들만을 회상하고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영원한 별이자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여배우였던 故 윤정희 씨 그녀의 영원한 평안과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