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 2024

“호적도 못 올리고..상속마저..”빈 손으로 떠나버린 현미,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한 아들의 행동에 모두가 오열

현미 씨와 이봉조 씨 사이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바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산 한 푼 받지 못하고 병만 얻은 꼴이 되고 말았어요. 드디어 미국에서 두 아들이 들어와 별세 후 3일 만에 빈소를 차리게 되었는데요.

두 아들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현미 씨의 마지막 유언이 밝혀졌는데요.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미의 안타까운 인생

현미 씨는 이봉조 씨가 유부남인 줄 전혀 모르고 만나 아들을 둘이나 낳으며 무려 20여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봉조 씨에게 아이가 두 명이나 더 있다는 것을 현미 씨는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것이었죠. 결구 현미 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나오며 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빈털터리로 나온 현미 씨가 가엾어 의리의 남자 신성일 씨가 자기 명의로 대출을 얻어 같은 단지 내 아파트에 집을 얻어줘 엄앵란 씨와 그녀는 서로 오고 가며 친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현미 씨는 이봉조 씨와의 문제로 자녀들이 상처를 많이 받을 것을 염려해 두 아들을 1979년 미국으로 유학을 시킵니다.

그렇게 지내던 13년 뒤 이봉조 씨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찾아갔는데 그는 부인에게 가지 않고 그동안 홀아비로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는 다시 자기를 받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는데 그 모습에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현미 씨는 다시 재결합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었죠.

그러나 일주일 후 갑자기 연락이 와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 한것을 듣게 됩니다.

호적에도 올리지 못 했던 두 아들

그의 사망 후 또 한 번 현미 씨와 아들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봉조 씨가 바람을 피운 것보다 더 잘못한 것은 두 아들들을 그때까지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이었어요.

현미 씨는 물론이고 두 아들은 호적 때문에 상당 기간 고통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그의 부인과 이혼하지 않아 그의 자녀는 법적으로 그의 부인이 낳은 4명의 자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소송을 하면 현미 씨는 몰라도 친 자녀는 상속을 똑같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미 씨와 두 아들은 상속을 포기합니다.

이봉조 씨의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아버지가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죠. 현미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난 재산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전 아내가 모두 가져갔다. 변호사가 충분히 재산 일부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가 싫어하실 일은 끝까지 하지 말자고 말해 정말 한 푼도 챙기지 않고 더욱 열심히 살아왔다”.

렇게 이봉조 씨는 살아 생전에도 그랬지만 돌아가시면서도 현미 씨와 두 아들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했고 재산도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두 아들은 중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상처가 많았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죠.

자기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니 마흔 살 다 되고 나서야 이제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죠.

손에 아무것도 없이 떠난..

그런데 돈이 다가 아니지만 현미 씨마저 자녀들에게 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현미 씨는 한국에서 홀로 40년 넘게 혼자 살다가 안타깝게 별세하셨는데요.

현미 씨는 밤 무대를 뛰며 힘들게 돈을 벌었는데 2015년 사람이 좋다에 나와 “사기를 당해 수십억의 돈을 잃고 심지어 빚까지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갚다 갚다 남은 빚이 7억 정도라고 사람을 너무 잘 믿어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현미 씨는 매니저비를 줄 수 없게 되어 매니저를 내보내고 혼자 고속버스 기차 등을 타고 다니며 행사나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제 상태인데도 그녀의 마지막 공연은 노인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었습니다.

사실 현미씨는 돈보다 항상 자식 걱정뿐이었다고 하는데요.현미씨가 늘 걱정했던 것은 두 아들의 건강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나쁜 유전자만 물려받아 큰 아들은 심장 쪽이 안 좋고 둘째 아들은 당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죠. 특히 큰 아들이 생사의 고비를 넘을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부동산업을 하며 몸이 약한 형을 대신해서 자기가 가정을 챙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트레스가 당뇨에 더 안 좋은데 그래서 현미 씨는 팔순이 넘어서도 아들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들들과 떨어져 한국에서 외롭게 혼자 살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 유언

현미 씨는 살아생전 자기는 죽으면 두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묻히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아이들 곁에 있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죠.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는 때가 되면 미국 아들들 곁으로 가서 자기 아들 둘을 돌봐준 할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대한가수협회장으로 5일간 장례를 치르는데 11일 오전 발인하는데요. 장지는 서울 추모공원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들어 새로운 뉴스가 떴었는데요. 어머니의 유언대로 미국으로 모셔가기로 했다고 하죠. 발인은 11일 오전 10시이며, 서울 추모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마친 뒤 고인의 유해는 두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향합니다.

현미 씨의 큰 아들은 “나도 동생도 미국에 거주한 지 오래됐고 아무래도 이곳에 모시면 자주 찾아뵐 수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모시고 가서 자주 뵙기 위해 미국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이자 유언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리고며 이제 현미님은 아드님들 곁에서 늘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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