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1, 2025

“얼마 전까지 건강하셨는데 이렇게..” 개그맨 전유성, 위독하다는 소식 뜬지 얼마 됐다고 결국에는..

전유성 별세와 ‘개그계의 대부’ 생애

한국 현대 코미디사의 산증인이자 ‘개그계의 대부’ 전유성이 25일 밤 전북대학교병원에서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에 따르면 유일한 가족인 딸 제비 씨가 임종을 지켰으며,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러지고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1949년생인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연출과를 졸업하고 1968년 TBC 특채 코미디 작가로 방송을 시작했다. 곧 코미디언으로 전향해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 굵직한 프로그램을 통해 1970~80년대 전성기를 이끌며 ‘국민 개그맨’으로 사랑받았다. 슬랩스틱 일색이던 시절, 무딘 듯 핵심을 찌르는 언변과 시대 풍자, 허를 찌르는 무대 매너로 한국 TV 코미디의 문법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부고 소식은 하나의 시대가 저문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그콘서트 원안과 아이디어 뱅크의 유산

전유성은 ‘코미디언’ 대신 ‘개그맨’이라는 명칭을 대중화한 장본인으로 ‘1호 개그맨’ ‘개그맨의 조상’이라 불렸다. 개그를 하나의 전문 공연 장르로 인식시키며 대중문화 속 위상을 확립했고, 1990년대 후반에는 KBS <개그콘서트>의 원안을 제시해 대학로 소극장 개그의 생동감을 방송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였다. 무대 세트·관객 참여·아이디어 실험 구조를 정착시켜 공개 코미디 붐을 촉발했고, 이 포맷은 20년 넘게 한국 코미디의 표준이 됐다.

그는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을 찾아가라’는 말이 돌 정도의 아이디어 뱅크이자 다작의 저술가였다.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시리즈,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전유성의 구라 삼국지> 등에서 드러나듯, 기교보다 구조·상황 설계, 말보다 글의 힘으로 웃음을 빚어냈다. 선후배가 자유롭게 구상과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생태계를 강조하며 스승으로 기억된다.

전유성의 전원생활·가족사

현업 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난 뒤에도 전유성의 무대는 지방 곳곳으로 확장됐다. 2007년 청도에 자리 잡고 사단법인 ‘청도코미디시장’ 대표이사로 지역 공연 활성화를 주도했으며, 2011년에는 국내 농촌 지역 유일의 공개 코미디 전용 공연장 ‘청도 철가방극장’을 열었다. “코미디도 배달된다”는 콘셉트로 7년간 4400회 공연을 올리며 수십만 관객을 맞아 TV 밖 코미디의 외연을 넓혔다.

1990년대 중반 SBS <좋은 친구들>의 ‘전유성을 웃겨라’ 코너처럼, 그는 잘 웃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개그맨은 웃기는 사람이지 웃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후배들의 기준점을 세웠다. 1993년 가수 진미령과 결혼했으나 2011년 이혼, 슬하에 딸 제비 씨가 있으며 2018년에는 청도를 떠나 남원으로 거처를 옮겨 딸 내외와 지냈다. 전유성의 삶은 방송과 지역 무대를 잇는 가교이자, 아이디어와 구조로 웃음을 설계한 ‘개그의 장인정신’ 그 자체였다. 그의 씨앗에서 자라난 한국 코미디는 이제 후배들이 꽃을 피워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