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려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결혼을 하면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데요. 남자의 경우는 어떤 아내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오늘의 주인공 이성민 역시 ‘첫 인상이 재수 없다’고 고백한 아내를 굶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가스비 낼 돈조차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는데요. 뿐만 아니라 딸의 탄생이 부담스러워 식은땀을 흘리고 그때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여전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배우 이성민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1968년 경북 봉화군 시골에서 태어난 이성민은 고 3때 연극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영화과에 이력서를 냈지만 당시 담임 선생님이 “선생님들 야가 연극 영화과 간답니다. 네가 인마 이 학교 개교일에 처음이야”라고 하며 이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조차 그를 불러 “네가 연기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너는 아니다. 차라리 공부를 더 해서 좋은 대학 다시 가라.”라고 하며 면전에서 원서를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성민은 주위 사람들의 강한 만류로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배우의 꿈을 포기하게 됩니다.
당시 이성민은 본인의 주변 환경 때문에 감히 배우가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요, 하지만 나중에 본인이 성공을 한 이후에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교장 선생님 전화를 걸어 “모교를 빛내줘서 고맙다”라고 했다고 하죠.
어쨌든 이후 배우를 포기하고 재수를 하고 지내던 어느날 자신이 탔던 버스의 문이 열리는데 거기서 ‘연극 단원 모집’이라는 포스터가 눈에 띄어 시골에서도 공부와 함께 병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던 배우의 꿈이 꿈틀꿈틀 살아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우의 꿈과 고난
이후 그는 재수생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극단을 찾아가서 잠시 접었던 배우의 길로 다시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당시 집에는 비밀로 하고 공부는 완전히 포기하고 극단 선배들의 뒤만 따라다니며 극단 생활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생애 첫 공연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 때 눈물이 나서 가슴 속에는 뭔가가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20살에 잠깐 경험했던 이 느낌이 지금까지 35년간 배우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이 극단 생활은 결국 어머니에게 들키고 아버지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갔는데, 그야말로 집안이 난리가 나고, 심지어 친척들까지 그의 연극을 극구 말렸고, 결국 “마지막 공연까지만 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약속한 뒤 또 한 번 배우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대에 입대해서도 연극 생활의 기억과 감동이 자꾸 가슴 속에서 남아있었는데, 마침 연극 연출을 하던 한 선배가” 대구로 와라 오면 담뱃값 하고 밥은 먹어줄게” 라고 하자 전역한 지 일주일 만에 단돈 7만 원을 들고 더 큰 세계에서 연극을 하겠다는 꿈을 안은 채 결국 대구로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간 대구에서 본 연극은 그에게 신세계였지만 ‘밥값은 챙겨주겠다’는 선배의 말은 사실상 거짓말이라 이때부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무일푼에 도움을 청할 선배나 친구도 하나 없는 낯선 대구에서 다른 사람이 먹을 때나 옆에 껴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서러운 마음에 혼자서 베개를 껴안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고 하죠.
그러다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파 주위를 살펴보니 커피 프림이 보이길래 끓인 물에 커피 프림을 풀고 남은 마가린과 설탕을 부어 먹어봤는데 그날 먹은 이 음식이 생에 먹어본 최악의 음식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반려자
이렇게 고생하던 시기 이성민은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인연인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아내의 첫인상은 굉장히 재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이성민 연극 때문에 안무가가 필요했고, 지인의 소개로 무용과 아내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때의 인연으로 아내가 매 공연마다 따라다니며 자주 보고, 그가 다쳤을 때 걱정을 해주며 때론 밤에 전화까지 몇 번 오자 이성민은 속으로 “안무비를 달라는 거구나 안무비를 줄 때가 됐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하죠.
당시 극단에서는 아내의 안무비 책정이 안 되어 있다 보니 본인의 선에서 적당히 해결해야 하겠다고 마음 먹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 한번 하시죠?”라고 하며 안무비를 밥으로 때우려고 했는데 “아내가 자주 연락해도 돼요?”라고 하며 먼저 고백을 했고, 그렇게 이성민은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형편도 안 되고, 돈도 없고, 능력도 안 되니 결혼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말라는 조건을 걸고 연애를 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성민의 아내가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내며 결혼하길 원했지만 이성민은 형편이 어려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이성민의 아내는 본인의 부모님에게 이성민의 형편을 잘 설명하고 어떻게든 결혼을 승낙 받는데 성공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죠.
하지만 당시 형편 때문에 결혼과 함께 바로 아내를 굶기기도 하고 가스비를 낼 돈조차 없어서 장인어른의 카드로 결제를 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요. 그럼에도 당시 장인어른은 내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딸이 걱정할까 봐 한 번도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훗날 이성민이 배우로서 성공을 한 후에야 장인어른이 집으로 처음 방문했고, 그때 스스로 참 뿌듯했다고 합니다.
가족
이성민은 당시 단칸방 신혼 생활에 방조차 얻을 돈이 없어 겨우 겨우 보증금을 간신히 구할 정도여서 당분간 아이를 갖기 않기로 했었지만 신혼여행에서 덜컥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이때 아내에게 안 굶기겠다고 하고 굶기고, 아기 안 가지겠다고 하고 바로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 버려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임신 소식을 듣고도 두려움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 없어서 오히려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죠.
이후 이성민은 가족과 형편 때문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35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홀로 서울로 상경해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형편이 너무 좋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 아내와 딸이 있는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본인이 늘 10만 원씩 용돈을 받아 차비와 담뱃값을 했는데 그 돈을 받아갈 때가 가장 미안했다고 하죠.
무명생활
그렇게 이성민은 서울에서 연극 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무명생활은 청산하지 못했고 연극 생활을 정리하려 했지만 아내의 응원으로 가족 모두가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해서 지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당시 딸이 서울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하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는데 고기 사줄 형편이 안 돼서 1500원짜리 대패 삼겹살을 사주는데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서 그때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이날 이후 대패 삼겹살은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했음에도 이성민의 아내는 단 한번도 그에게 연기를 그만두길 바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2004년 한 영화의 건달력으로 엑스트라로 출연했는데 이때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배우 손현주가 그를 추천하면서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작품에서 신들린 연기를 보이며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 후에도 과거 아내를 워낙에 고생시킨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미안해하며 잡혀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고백
마지막으로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내가 영화 ‘공작’으로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까지 밟게 되었는데, 이때 아내도 같이 갔었다. 그리고 거기는 드레스 코드가 있어서 평소 치마를 입지 않던 아내가 옷을 산다고 일주일을 준비하는데 너무 좋아하더라.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볼 때는 자더라.
그리고 또 한 번은 백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멋지게 차려 입은 채로 집에 갔는데 오자마자 나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내에게 나 백상에서 상 받고 온 사람이야 했더니 ‘그래서?’라고 하며 아랑곳하지 않고 빨리 버리고 오라고 하더라. 사실 이제는 대접을 좀 받아도 되는데 이상하게도 집에만 들어가면 왜 내가 작아지고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