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 2024

“선배님이 저한테 그러실 줄은..” 80세 넘은 박근형이 전도연을 매일 울게 만들었던 이유, 결국 터질게 터져버려..

박근형은 배우들의 연기 관련해서는 굉장히 거침없이 말을 하는 편입니다. 심지어 1999년 자신의 모교 중앙대에서 총장 앞에서 대놓고 중앙대 연극영화과는 배종옥 이후로 형편이 없다고 해서 당시 중앙대 총장이고 부총장이고 모두 사색으로 만들어 버렸던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군기반장 배우 박근형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명랑하고 활동적이었던 어린 박근형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당시 어른들이 서울이 무너졌다., 천안이 무너졌다., 평택이 무너졌다 하며 불안해할 때마다 그의 걱정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그의 식구들도 짝을 이뤄 피난을 갔는데 박근형 그는 여동생과 함께 입암리 석산 마을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고모의 마을조차 이후 인민군들에게 점령된 후에는 대낮에 강물에서 포탄이 발견되는 등 당시 그는 마루 밑에 지하 방공호를 파고 숨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6.25 전쟁으로 인한 대혼란은 그가 중학교 3학년 때가 돼서야 조금씩 수그러들었다고 했습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

그러던 가운데 그가 1학년이던 늦가을 무렵, 전국 중고교 연극대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그는 우연히 대사가 3~4가지밖에 안 되는 비중이 작은 역을 맡으며 대회에 참가했고 그의 학교가 전국 3등을 하면서 이를 계기로 이후 그는 매년 가을마다 연극제에 참가하는 등 연극에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어 서울까지 상경의 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그는 소위 연극 바람이 시작되어 내리 3년을 연극에 쏟아부으며 공부는 뒷전이 되어버렸으며, 이후 대학교 입시 철이 되니 의사는커녕 대학은 갈 수 있을까?라며 그렇게 불효막심한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연극에 빠져 공부가 뒷전이 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1년간 배우전문 학원에 들어가서 연극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폐인처럼 살게된 이유

이후 박근형은 KBS 공채 3기 탤런트로 방송 드라마와도 인연을 맺었고 놀랍게도 그가 KBS에 입사한 지 2년 만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로는 당시 방송사 드라마는 정통 연극과 달리, 배우들의 연기 수준이 너무나 형편이 없었고 그래서 그가 배우들의 문제점에 대해 자주 지적하고 곧잘 비판하자, 그런 행동이 오히려 연출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결국은 반대로 그가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이제 이런 생활은 그만 접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회의를 느껴 1967년 초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낮에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 일을 도우며 밤이면 친구들과 술만 마시며 지냈습니다. 또한 연예계 소식은 접하고 싶지 않아서 신문조차 일절 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게 된 연기

그렇게 폐인처럼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엽서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예전에 같이 했던 한 연출가가 한 달만 연습해서 연극 한 편만 해달라는 내용이었고 당시 그는 엽서를 손에 들고 엄청 고민하다가 결국 딱 한 편만 하고 오자하고 다시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편만 하겠다는 연극은 막을 올리자마자 그는 큰 주목을 받으며 당시 연극계 최고 권위인 동아연극상까지 받는 행운을 안았고 이후 예전에 알고 있던 방송국 PD에게 “젊은 놈이 그거 하나 못 이겨내고 하다 말고 내려가는 놈이 어디 있냐?”라고 호통을 들은 후 다시 방송국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9년 MBC가 개국하면서 그는 개국 멤버로 스카웃되어 굉장히 많은 작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특정 방송사에 소속되어 있는 데서 오는 불합리함, 창작 활동하는 배우로서의 한계 등에 염증을 느낀 그는 1971년에 다시 프리랜서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당시만 하더라도 박근형처럼 방송사들에 오가며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배우는 드물었는데 그가 프리랜서 배우로는 최초로 방송사 관계없이 영화계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게 됩니다.

이후로도 그는 여명의 눈동자, 모래 시계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국민 배우로 거듭나게 되었고 또한 많은 후배가 박근형을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배우로 꼽으며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의 우상으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박근형은 현재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순재와 함께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배우입니다. 또한 앞서 얘기한 대로 그는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군기반장 중 하나로, 전도연도 신인시절 당시 박근형의 호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촬영 내내 울면서 촬영을 해야 했고 오죽하면 박근형의 자식 역할을 하면 연기력이 급성장한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후배들의 연기에 대해서 따끔하게 지적하는 모습들로 인해 존재 자체가 연기의 교과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박근형 그가 고백하길 “젊은 시절엔 내가 80대가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잊고 지냈던 내 나이가 떠오르면 깜짝깜짝 놀란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두고 나이가 많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늙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결국 젊고 늙음은 마음의 상태인 것 같다.

또한 다시 태어난다면 배우는 하지 않겠다. 난데없이 주저앉는 직업으로 언제 나를 찾아줄지 모르는 외로운 직업이다. 배우가 된 이상, 세상에 100개의 배역이 있다면 배우는 그 100개를 전부 해야 한다라는 철학을 지니고 있으며 배우의 욕망은 끝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바지 뒷주머니에 대본을 대충 꽂은 후배들의 모습은 정말 보기 싫다. 연기를 못해 다른 배우를 불편하게 하면 그건 횡포다. 연기는 공동의 작업이기에 쉼 없이 단련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