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 2024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아침마당 김재원 아나운서 돌연 잠적한 안타까운 이유가..

아나운서에도 여러 유형이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아나운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하면 그건 바로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건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듣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김재원 아나운서는 앞서 얘기한 아나운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따뜻한 마음으로 듣기를 누구보다 잘 실천하는 사람으로 현재 그는 <아침마당>이라는 프로를 통해 우리는 사는 얘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고 때로는 위로가 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과거 아침마당을 하차하며 반신불수 아버지를 6년간 간호하다 돌아가신 다음 날에도 노래 자랑을 진행하며 돌연 가족들과 캐나다로 떠난 뒤 아침마당을 마지막으로 하던 날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내 삶이 정제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고 고백한 김재원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아침마당 아나운서 김재원의 유년시절

1967년 외동 아들로 태어난 김재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호텔에서 미용실을 하셨는데 어느 날 거기에 불이 나면서 미용실에 일하던 누나들 몇 명이 세상을 떠나자 이때 큰 충격을 받았는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이날부로 교회를 나가시게 됩니다.

이후 어머니는 뒤늦게 교회를 나간 게 무색할 만큼 신앙이 굉장히 뜨거웠는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어머니가 자주 아파트 창문을 열고 “예수님 사랑해요”하고 외쳤으며 또한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 옆에 앉은 사람에게 꼭 전도를 하셔서 당시 어린 김재원은 무척 창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뜨겁게 교회를 다닌 지 2년 남짓 됐을 때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담석증이라고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했지만 호전이 없길래 다시 알아보니까 간암이었고, 이후 어머니는 새벽마다 웅얼웅얼 방언으로 기도를 하며 갑자기 예수님 하고 외치기도 하셨지만 결국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재원의 헌신적인 아버지, 그리고 일찍 철이 든 이유

당시 어린 김재원의 인생에서 어머니가 없는 삶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이후 그는 많이 당황하고 방황하게 되는데 특히 학창시절 매학년 진급할 때마다 반장 엄마가 학부모 모임을 만들고 집에 전화가 올 때면 한부모 가족만이 갖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 이후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그는 아버지가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당시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하고 항상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마음을 읽어야 했는데, 그래서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때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못 했던 게 가장 안타깝고 후회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 김재원을 정말 헌신적으로 키웠는데, 당시 궂은 집안 일도 혼자 도맡아 하시며 특히 아침잠을 깨우던 아버지의 도마 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보통 어머니들의 도마 소리는 ‘탁탁탁탁’ 경쾌한 리듬이라면 당시 아버지의 도마 소리는 ‘탁, 탁’ 뭔가 서툴고 투박했지만
그래도 어린 김재원에게는 그것이 깊은 사랑의 울림으로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가 아들의 도시락에 늘 튼실하게 만든 계란 말이를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싸줬는데 사실 이때 그는 계란 말이가 지겹고 싫었으나 아버지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알고 내색을 하지 않으며 일찍 철이 들게 됩니다. 그러다 그가 18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아버지의 헌신은 멈추지 않고 이후 아들이 대학을 마치자 엄마의 소원이었다며 그를 미국 유학까지 보내게 됩니다.

김재원의 결혼…그리고 아버지의 병환

한편 이 무렵 그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사실 그의 아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짝꿍으로 당시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아웅다웅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은 대학은 달랐지만 같은 교회를 다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나설 정도로 말 그대로 친한 친구였는데 그런데 어느 날 김재원 그가 그래도 “네가 제일 낫더라”라고 고백한 뒤 두 사람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헌신으로 유학을 가게 된 그는 당시 아내와 1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나누다가 이후 아내의 방학에 맞춰서 마침내 결혼까지 하며 두 사람은 신혼생활을 미국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미국에서 유학과 결혼 생활을 하던 1994년 어느 날 하루는 새벽 2시쯤 한국에서 전화가 와 그는 한국에서 누가 시차를 잘못 계산해 한밤 중에 전화를 했나 보다라며 마땅치 않은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는데 그런데 이때 그의 아버지가 힘 없는 목소리로 “재훈아 내가 아프다 네가 한국 들어와서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야겠다”라고 하시곤 아무 말씀도 없이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당시 뇌경색이 와 쓰러졌던 거고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를 잘못 놓았는지 계속 통화 중 신호만 가자 이때 사촌과 친구들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집에 가봐달라고 부탁을 하며 그는 그 길로 공항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그가 아내와 결혼한 지 딱 2개월이 된 신혼이었는데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은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혹시나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닌지

당시 얼마나 마음을 졸았는지 한국으로 오는 10시간이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병상에서 눈물로 아들을 맞이하며 천만 다행으로 의식은 되찾았지만 그러나 신체의 반쪽이 마비가 돼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결국 유학 생활을 완전히 접고 이날부로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김재원의 평생 은인인 장인, 장모

그렇게 이후부터는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는 병원 생활이 이어지게 되는데 당시 그가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밥을 떠먹여 드리고 또한 걸음마도 가르치며 마치 갓난아기 때 아버지가 그에게 해주었던 일들을 되감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한편 이때 아버지의 병이 길게 갈 것 같으니까 당시 장인 장모가 하루는 그에게 “자네 우리가 자네 아버님을 돌볼 테니 미국으로 돌아가서 하던 공부 마저 하고 오게나” 라고 하며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그리고 사실 아버지가 쓰러지던 첫날 밤에 밤새 옆에서 지켜준 분도 장인어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장인 장모 입장에서는 딸을 시집 보내고 단 두 달 만에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 보면 그분들이 가장 황당했을 텐데, 그럼에도 당시 서운한 말씀 한 번 안 하시고 오히려 사위를 지원하겠다고 하니 그때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김재원 아나운서 준비에 헌신적인 모든 사람들

하지만 마음만 받을 뿐 그렇게 할 수는 없었고, 아무튼 이후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던 중 하루는 병원에서 보호자들의 유일한 낙인 tv를 넉놓고 보고 있는데 그런데 그때 손범수 아나운서가 헬리콥터에서 내리더니 손을 쫙 뻗으며 “kbs 21기 신입사원을 모집합니다” 라고 외치자 그도 모르게 나도 아나운서나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가졌던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는데 하지만 자신의 꿈이 과하다고 판단해 잠시 아나운서라는 꿈을 내려놓았다가 병실에서 우연히 본 모집 공고에 한 번 해볼까라는 용기가 생겨 이때부터 본격적인 입사 공부가 시작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낮에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아버지가 주무시면 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 장인어른이 일간지를 오려서 그에게 시사 상식을 퍼나르고 또한 병실 보호자들은 채널 선택권을 그에게 모두 양보하며 그렇게 의사, 간호사, 보호자 심지어 환자들의 염원까지 담아 목숨 걸고 공부했더니 단 두 달 만에 kbs 아나운서 시험을 합격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스물여덟의 늦깍이로 방송사에 입사했고 또한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당시 방송이 끝나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라는 그의 엔딩 멘트는 시청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투병 중에도 아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아버지를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나오는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그리고 이때 그는 방송이 끝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살가운 아들이 되곤 했습니다.

아나운서의 운명을 거를 수 없었던 김재원

사실 김재원 그는 어릴 때는 아버지와 대화를 거의 못 하다가 아버지가 말씀을 못 하실 때가 돼서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는데 비록 눈빛으로 나누는 대화였지만 늘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챙기고 정을 나누고 비로소 그제서야 사랑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지방 발령을 받은 후에도 계속됐는데, 사실 말이 쉽지 당시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직장생활과 병간호를 병행한다는 게 보통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었고, 그렇게 무려 6년간을 아버지를 간호하며 ‘긴 병에 효자 없나 보다’라는 생각을 할 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신입사원 연수 받는 석 달 동안도 병원 간호사 방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출근을 했고, 오후에 퇴근하면 2시간 청량리행 기차를 타고 왔다가 막차 타고 다시 가서 몇 시간 쪽잠 자고 새벽에 출근했다가 오후 되면 또 서울로 오는 생활을 1년간 반복했다.

이후 서울로 발령받고서는 집에서 5년 정도 아버지를 모셨는데 당시 밤 근무를 주로 해서 마감 뉴스하고 아침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재활병원을 다녔다.

그리고 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때는 내가 평일 아침마당을 대타로 진행하고 있었고 그때 처음으로 핸드폰 사고 사흘째였는데 방송 끝나니까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오더라 아무튼 이후 4일간 장례를 치르고 왔는데, 그런데 이때 아침마당 책임 프로듀서가 나에게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하면서 또 토요일 진행을 해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노래 자랑을 진행했다.

나는 방송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한때는 아버지의 병간호가 길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김병의 효자 없나 보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죄송스럽다. 그리고 내가 6년간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어린 시절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이때 정말 많이 나눴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실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아버지와 얘기하고 마음을 표현할 거라는 후회를 지금까지도 한다 만약에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차를 결정했던 이유

아무튼 이후 kbs 아나운서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입사하고 10년쯤 되자 매일 반복되는 일들을 하다 보니까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재충전도 필요하고 해서 2005년 회사에 무급 휴가를 내고 퇴직금까지 중간 정산 받아 가족들과 함께 돌연 캐나다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내가 10년간 방송을 하고 나니 이대로 가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인생의 하프 타임을 설정하고 스스로를 재충전해서 후반전을 준비하자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회사나 어디 공식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당시 프로그램만 3개나 하고 있었는데 그걸 다 내려놓고 떠나는 나의 행보를 회사에서나 내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지금은 군대를 제대한 아들이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하고 아내를 다 데리고 과감하게 정리하고 떠났다 그리고 퇴직금에 손을 댄 건 60대에 쓰는 것보다 40대에 좀 더 효과적으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고 부족한 부분은 내가 일식집과 샌드위치 가게에서 설거지와 배달을 해서 충당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공부는 공부대로 노동은 노동대로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 순간이 행복했다. 1달러의 팁의 소중함도 느꼈고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아들 친구들 집에 배달을 간 적도 많았는데 아이가 한 번도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점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원래 1년을 생각했다가 2년 있기도 아쉬워 3년을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돌아와서는 박사 논문을 쓰면서 아침마당을 진행하고 또한 대학 강의도 나가면서 캐나다에서 3년이 충분히 충전이 되었는지 가장 밀도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